감옥에 갇힌 남편을 지켜낸 한 여인의 미공개 기록이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국내 기름값 연말까지 10% 오를 예정(사우디). 전기세도 6% 인상. 32곳의 중화학 공장들 73년부터 81년까지. 해외 차입금 32억 – 상환액은 9억. (…)유럽에서 핵 반대 시위 – 반미 움직임으로 확산. 대학교 시위 심각한 상황’
1981년 12월 19일. A4 용지만 한 종이 위에 국내외 정치와 경제 상황을 짧게 적어놓은 글들이 빼곡하다. 마치 암호 같아 보이는 이 쪽지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작성되었다.
1980년 신군부가 꾸민 내란 음모 혐의로 감옥에 갇힌 한 정치인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한 달에 단 한 번, 고작 10분 남짓 주어지는 면회 시간 동안 남편에게 바깥세상 소식을 빠르게 전하려고 이런 메모를 미리 준비해 갔다.
한 도서관이 광주 민주화 운동 46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주고받은 기록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는 감옥 안과 밖에서 남긴 기록, 편지, 해외 구명 활동 자료 등이 담겨 있다. 독재 시절이던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부터 신군부의 조작 사건으로 갇혀 있던 1982년까지의 기록이 집대성되었다.
도서관 관장은 출간 간담회에서 “수감 기록을 조사할수록 아내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며 “단순히 뒷바라지만 한 게 아니라 모든 연락 창구를 맡아 민주화 운동과 국제 연대 등 모든 분야에서 동반자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책에는 아내가 남긴 편지와 메모, 정부에 낸 신청서와 건의서 등 총 20건의 문서가 처음 공개되었다.
독재 시절 중앙정보부 납치, 집 감금, 체포를 겪은 남편의 고난을 생생히 기록한 ‘독일 인권단체에 남편의 고통을 알리는 글’은 아내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남편의 해외 구명 활동을 펼쳤다는 증거다.
신군부에 의해 갇힌 남편을 위해 국내외 소식을 요약 정리한 8건의 메모도 책에 실렸다.
남편의 고통을 보다 못한 아내는 정부 당국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글도 여러 차례 남겼다.
민주 구국 선언 이후 병원 감옥 병실에 갇힌 남편을 교도소로 옮겨달라고 구치소장에게 보낸 편지가 대표적이다. 운동도 허락되지 않고, 면회도 아내만 가능한 지옥 같은 환경에서 고통받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펜을 들었다.
“운동 부족과 햇빛 부족으로 인해 몸과 마음의 고통만 커지고 있어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길 수감자의 뜻에 따라 정식 서면으로 신청합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국 민주화를 이끈 정치인도 아내에게 고통을 털어놓았다는 사실도 책에 나온다. 아내가 면회 당시 남편의 말을 그대로 적어둔 메모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동안 자포자기해서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중략) 내 평생 이렇게 치욕스럽고 괴로웠던 적이 없다. 자다가도 숨이 막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을 지경이면 일어나 기도로 극복하곤 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아들은 “어머니는 결혼할 때 아버지를 단순히 남편이 아닌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함께 나아가는 동지라고 생각했다“며 “고난이 와도 굴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